TRAVELLER

창신동은 살아 있다


박제된 옛 동네에서 창조적인 새로운 공간으로 변모한 창신동 이야기.

 


얼마 전 컨템퍼러리 아트 갤러리 하나가 오픈했다는 뉴스를 읽었다. “창신동 보이드 갤러리에서 개관전 <Brave New World>를 연다”는 첫 문장에 눈이 꽂혔다. ‘창신동’에 ‘갤러리’라니. 이질적인 두 단어의 조합을 재차 되뇌었다. 봉제 공장들과 피혁 도매상, 낡은 빌라와 여인숙이 즐비한 거리 어느 틈에 갤러리가 들어앉았을까? 호기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후에도 창신동 발 문화계 뉴스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때마다 창신동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청년들이 상가 건물 옥상을 빌려 댄스 파티를 연다는 풍문, 아티스트 부부가 언덕배기 마을로 올라가 이웃들과 어울리며 책도 읽고 옷도 짓는다는 이야기, 한 술 더 떠 창신동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브랜드를 론칭한다는 이야기를 차례로 전해들었다.


참다 못해 발을 뗐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동대문역에서 내렸다. 흥인지문, 청계천, DDP에 이르는 서울의 마스코트를 뒤로하고 창신동의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갔다. 무심결에 지나치곤 했던 거리가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특히 봉제 공장 간판과 인장 거리 표지판이 새삼 비범해 보였다. 좀 더 깊숙이 걸음을 옮기니 과연 오래된 건물 사이사이에 모던하게 리모델링한 게스트 하우스와 문제의 갤러리, 공방이 자리해 있었다. 수십 년간 이 비좁은 거리에 모여 쉼 없이 생산과 창작에 몰두했을 장인들과 젊은 예술가들이 여전히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골목 한쪽에서는 봉제 공장 노동자로 흘러들어온 네팔인과 화교들이 이국적인 요리와 풍속으로 문화적 색채를 한층 풍부하게 만들어내는 모습을 봤다. 급기야 창신동이라는 이름자까지 멋지게 느껴졌다. 창의적이고(創) 새로운(新) 동네가 아닌가! 언어 유희 말고 역사적 사실을 이르자면 창신동은 ‘창성할 창昌’에 ‘믿을 신信’을 쓴다. 조선시대 이 구역을 이르던 명칭인 인창방仁昌坊, 숭신방崇信坊의 가운데 자를 딴 것이다.-오늘날 창신동 옆 동네가 된 숭인동은 둘의 머리글자를 땄다.-복숭아나무와 앵두나무가 유난히 많아 붉은 나무, 즉 홍수동紅樹洞이라는 애칭도 이 시기에 얻었다. 조선 실학자 이수광은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저술했다. 대한제국 시절 황실 산하의 사원 총괄 본부 격인 원흥사, 구한말 개화파 박영효와 손병희의 거처였던 상춘원이 있던 곳도 바로 여기다.


현대사로 접어들면 창신동을 거쳐간 위대한 작가 2인을 만난다. 바로 박수근과 백남준이다.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밥벌이를 했던 박수근은 이곳 창신동에서 생애 처음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박수근이 즐겨 그린 시장, 우물가, 빨래터는 그 시절 창신동의 풍경이었으리라. 한편 백남준은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냈다. 공공연히 고향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그는 작품 <동대문>(산업은행 소장)에서 직접 한복을 차려입고 흥인지문을 바라보는 영상을 삽입했다. 한 인터뷰를 통해서는 죽기 전에 다시찾고 싶은 곳으로 창신동 집을 꼽기도 했다. 과거를 돌이켜보는 동안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창신동의 역사가 오늘날의 괄목할 만한 변화를 귀납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문화 에너지가 지금에야 분출하기 시작했다.


동대문 청년

창신동 남쪽 청계천변으로 내려가면 3개 동의 신발도매상가가 나란히 서있다. 그중 B동 옥상을 주목해야 한다. 도시생활의 대안을 찾는 청년들의 발랄한 전진기지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DRP(Dongdaemun Rooftop Paradise)’, ‘동대문 옥상 낙원’의 준말이다. 이곳을 점거 중인 프로젝트 그룹 ‘동대문청년’은 올 상반기 동안 다양한 일들을 벌여왔다. 40년간 도매상가 틈에 쌓인 폐기물을 재조명하는 ‘옥상유물발굴파티’, 청년들에게 자유롭게 춤출 공간을 내어준 ‘18고지 옥상클럽’, 야행성을 지닌 이들을 위한 새벽모임 ’문라이즈 킹덤’ 등의 이벤트와 더불어 옥상 빈공간을 활용해 바질, 루콜라, 라벤더 등 식용 식물을 기르는 ‘어반파밍’까지, 소외된 도시자원으로 사회와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생존 방식을 제안하는 시도들이다. 이들의 다음 파티는 10월 초로 계획 중이니 관심 있다면 페이스북을 주시하는 게 좋겠다.


LOCATION 종로구 청계천로 307 신발도매상가 B동 608호(우측 옥상)

web facebook.com/dongdaemunyouth




신윤예(‘000간’ 대표) “창신동에 꼭 맞는 옷을 짓는 것이 ‘000간’의 목표입니다.”


000간

2011년 지역 아동들을 위한 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젊은 예술가가 삶과 예술을 잇는 방법을 고심하다 이곳 창신동에 둥지를 틀었다. 바로 그 둥지, ‘메이드 인 창신동’을 타이틀 삼아 활동하는 지역 기반 활동 그룹 ‘000간’의 본부를 소개한다. 이곳에서는 봉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창신동에서 나온 자투리 천을 모아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방식으로 물건을 만든다. 방석, 브로치, 셔츠와 에코 백 등 패브릭 제품이 주를 이루며, 심플한 디자인과 실용성을 고루 갖췄다. 방석과 브로치는 방문자가 직접 만들어볼 수도 있다. 한편에선 동네로스팅 카페인 ‘달카페’의 신선한 원두를 사용하는 카페도 운영한다. 버려진 화분과 거울을 이용한 업사이클링 작업 ‘H 빌리지 프로젝트’, 댄스시어터 ‘틱’과 함께 ‘춤추는 계단’ 행사 등을 벌여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이들의 착한 프로젝트를 직접 보고 싶다면 정기 세미나 ‘만나고싶데이’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볼 것.


LOCATION 종로구 창신10가길 1-11

TEL 070-7626-5782

창신기지

창신동 셋방촌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멀리 시멘트를 곱게 바른 주택 하나가 보인다. 한옥 골조에 철근을 덧대어 독특한 조화를 이룬 이 모던한 건물은 낡은 빌라며 여인숙이 즐비한 풍경 속에서 신선한 이질감을 안긴다. 묵직한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히노키탕이 있는 마당이 펼쳐진다. 이곳은 4년 전 폐가로 쓰러져가던 옛 한옥집을 렌트하우스로 개조한 ‘창신기지’다. 주인장의 어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살던 집으로, 1538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마당 포함 20평 남짓한 공간을 벽을 허물고 원룸으로 만들어 여러 명이 머물 수 있는 객실로 단장했다. ‘카레클린트’의 원목 가구를 비롯해 그릇과 수저 하나까지 신경 쓴 세련된 집기들이 공간을 조용히 장식한다.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라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더욱 인기가 좋다. 바비큐 그릴이 있어 캠핑하는 기분으로 하룻밤 묵어가기에 적당하다. 각종 친목 모임을 갖기에도 그만이다. 


LOCATION 종로구 종로48길 31 

TEL 010-7210-4286



신상묵&주형준 (‘창신테이블’ 대표&디자이너) “창신동 봉제 거리의 긍정적 이윤 배분을 목표합니다.”



창신테이블

신진 디자이너와 창신동 봉제 공장을 연결하는 플랫폼 ‘창신테이블’. 작년 10월 창신동으로 들어온 이래 합이 맞는 봉제 공장들과 개별 디자이너의 만남을 알선해왔다. 이들 업체의 특성과 작업 경향을 고려해 브랜딩을 하는 것이 이들의 주특기다. 첫 번째 결과물인 ‘그로그로Grogro’는 구름과 빗방울, 잔디와 같은 동화적 상상력을 담은 쿠션을 만드는 브랜드다. 독특한 모양새에서 세밀한 작업에 탁월한 창신동 봉제 공장의 실력을 볼 수 있다. 현재 DDP와 온라인 쇼핑몰에서 판매 중이다. 이곳에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해당 프로그램은 물론 종로구청과 협업한 세미나나 공장 투어, 설명회 등을 진행한다. 창조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장은 늘 도심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창신동의 활성화를 꿈꾸는 공간이다.


LOCATION 종로구 창신길 79 1층

TEL 02-762-1220




카페 도어스

간판이 없다. 오직 외벽 유리에 쓰인 ‘Every Body Coffee Now’와 아늑한 내부가 카페임을 짐작케 한다. 문을 열면 빈티지 문으로 만든 아일랜드식 홈 바가 눈에 들어온다. ‘카페 도어스’는 일대에 몇 안 되는 개인카페로 커피와 에이드, 아이스티 정도의 간소한 메뉴를 선보인다. 모든 에스프레소 음료가 더블샷이므로 우유가 들어간 라테나 카푸치노를 주문하는 것이 좋다. 가격은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절반인데 그 덕에 동네 주민들의 환심을 샀다. 게다가 봉제가 생업인 동네에 융화되고자 테이크아웃용 종이컵에 체크 패턴을 입히는 센스도 발휘했다. 벽 곳곳엔 주인장의 취향이 돋보이는 그림을 걸어두었다. 때때로 바뀌는 그림들이 작은 갤러리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DDP가 멀지 않아 DDP에서 전시 관람 후 커피 한잔하러 오기 좋다.


LOCATION 종로구 율곡로 259

TEL 02-766-9855




승진완구

120여 개의 가게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창신동 문구완구시장은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문구완구 도매시장이다. 그중 승진완구는 가장 큰 상점이다. 주요 품목인 레고를 비롯한 각종 완구가 복층 구조의 넓은 매장에 빼곡히 쌓여 있다. 단순한 봉제 인형부터 복잡한 구조의 조립 완구까지 다양한 종류를 망라한다. 진열된 장난감 중 몇몇은 어린이를 겨냥했다기에는 지나쳐 보일 만큼 섬세하거나 호사스럽다. 바비컬렉터, 미니카 마니아 등 ‘키덜트’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희귀 제품들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엄마 손잡고 나온 아이들이 아니라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도매상들, 그리고 특정 물건만을 찾아 헤매는 ‘덕후’들까지 어른들로 북적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매 전문 상가이기 때문에 시가 대비 20~30퍼센트 할인해 판매한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LOCATION 종로구 종로52길 30

TEL 02-747-1900




다르샨

창신동 네팔 거리는 영업 이력이 수년씩 된 레스토랑들이 터줏대감으로 자리해 있다. 그 틈바구니에 새 얼굴이 등장했다. 올봄 문을 연 ‘다르샨’은 성신여대 앞 ‘나마스테 인 서울’의 자매 레스토랑이다. 둘 다 네팔어이지만 ‘나마스테’보다 극진한 인사 표현이 바로 ‘다르샨’이다. 이곳은 이국 향취가 강한 여느 네팔 레스토랑과 달리 산뜻한 인테리어로 꾸민 것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음식에 있어선 지역색을 포기하지 않는다. 로컬 푸드 초보자라면 ‘마크니 커리’와 전통 음료 ‘라씨’의 진득한 풍미가 살짝 버겁게 느껴질 정도. 군만두와 비슷한 ‘사모사’도 향신료 맛이 강한 편이다. 네팔 음식의 정석을 맛볼 용기가 있다면 차원이 다른 맛의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모든 메뉴엔 네팔에서 김치처럼 먹는다는 장아찌 ‘아샤르achar’를 함께 내는데 피클과 비슷하지만 피클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


LOCATION 종로구 종로 321

TEL 02-3675-1872



동북화과왕

“짜장면, 짬뽕, 그런 건 안 해요.” ‘동북화과왕’은 ‘진짜배기’ 중국 요리를 선보이는 음식점이다. “대신 장수면과 타로면을 팔죠.” 창신동 로컬 푸드의 ‘끝판왕’답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인 메뉴판을 들춰보면 메인 요리인 양꼬치를 비롯해 중국 동북식으로 조리한 각종 육류 볶음과 면류가 죽 적혀 있다. 대개의 메뉴가 생경하다. 꼴뚜기볶음, 탕초갈비, 향신육사, 소천엽데침…. 지면에 소개하기엔 ‘하드코어’한 요리도 수두룩하다. 남녀노소 모두 즐길 만한 메뉴는 경장육사다. 잘게 썬 돼지고기를 춘장에 볶아내는 음식인데 담백하면서도 고소하다.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것은 꿔바로우인데, 역시 흔한 맛은 아니다. 튀김옷은 바삭하면서도 찰기가 있고 소스는 새큼한 향과 쫀득쫀득한 질감이 훌륭하다. 공부가주, 고려촌주, 이과두주, 하얼빈 맥주 등 30여 종의 방대한 주류 컬렉션도 함께 선보인다.


LOCATION 종로구 종로46길 11 2층

TEL 02-745-5168


인턴 에디터 강은주

어시스턴트 에디터 권아름

포토그래퍼 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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